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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레전드-양준혁

동군영20 2022. 6. 1. 20:40

맞춤법 검사를 원하는 단어나 문장을 입력해 주세요 야구가 인생을 담은 경기라는 말은 페넌트레이스 제도를 빼놓고는 설명하기 어렵다. 프로야구는 페넌트레이스 중에 매일 같이 경기가 열린다. 페넌트레이스는 승률 5할을 놈 나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싸움이다. 시즌 승률은 매일의 5할 승부 그 결과가 모여 결정된다. 그래서 야구는 하루하루 성공과 실패를 겪고 사는 생활인에게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사랑했던 스타의 멋진 은퇴식을 바라고 또 그런 은퇴식이 여운에 남는 건 그가 긴 세월 함께 공명했던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양준혁의 선수 마지막

양준혁은 2010년 9월 19일 정들었던 대구구장에서 은퇴식을 치렀다. 그때가 양준혁이 은퇴하기에 적당한 시기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양준혁은 마흔 살인 2009년 부상으로 규정타석을 채우진 못했지만 타율. 329를 기록했다. 2010년엔 부산고 부진 그리고 젊은 선수를 키우려는 구단 우리 방침으로 부진했다.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양준혁이기에 또 다른 3할 시즌은 가능해 보였다. 양준혁은 마지막 안타를 친 그해 7월 1일 경기 뒤 기회가 오는 대로 열심히 하겠다. 대타라도 자주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 매 타석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미 양준혁은 프로야구에서 많은 것ㅅ을 이뤘다. 그의 이름은 거의 모든 공격 부문에서 후배들이 넘어야 할 벽이 됐다. 양준혁은 최고 타자 안 이런 것이라는 기준을 세운 선수다. 야구팬들은 삼성 유니폼을 입고 뛰는 그라운드를 누비는 양준혁을 볼 1-2년 혹은 그보다 많은 시간을 잃어버렸다. 대신 최고의 선수가 감동적으로 은퇴하는 장면을 영원히 뇌리에 새기게 됐다.  양준혁의 은퇴식은 이제 프로야구의 전설이됐다,많은 대구팬들이 이만수와 장효조 김시진과 이선희에게서 얻지못했던 감동이다.

 

나는 삼성맨 양준혁과 함께한 삼성라이온즈 

현역 시즌 가운데 양준혁은 시즌을 삼성에서 뛰었다. 그는 데뷔 전과 은퇴식에서 모두 삼성 유니폼을 입었다. 원년부터
1992년까지 삼성은 페넌트레이스 기준으론 최고 명문 팀이었다. 11시즌 동안 리그 최다인 681승을 거뒀다. 이승수는 라이벌 해태보다 15승 많았다. 한국시리즈 우승은 없었지만 1985~1987년엔 3년 연속 페넌트레이스 최다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양준혁이 입단한 1993년 삼성은 명문의 권위보다는 도전이 필요한 팀이었다. 1990년 한국시리즈 패배 뒤 출범시킨 김성근 감독 체제는 실패로 끝났다. 2년 연속 포스트시즌에는 진출했지만 한국시리즈 무대에는 서지 못했다. 4월 10일 대구 개막전 선발 라인업은 김성현 양준혁 정경훈 김용국 류중일 김성래 정영규 이종두 이만수였다. 과거와 같은 화려함은 없었다. 4번 타자 이만수는 쇠퇴기에 접어들었고 5번 김성래는 오랜 부상 끝에 그 전해에 기지개를 켠 선수였다. 1992년 팀득점은 8개 구단 중 4위 시즌 구단은 김성근 감독을 퇴진시키며 여러 노장 선수들을 동반정리했다.